역사,사회

조선후기 내용

by anakii1 2019. 11. 1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요약

임진왜란 
1592년 왜 침략. 임금의 피난. 명으로 넘어가는 문제에 대해 명과 양반들의 반대.
명군이 참전. 의병들의 활동.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가 관군을 결집.
왜군이 궁지에 몰려 명-왜 휴전협상. 명군의 약탈.
협상이 깨지며 부산포의 왜군이 재침. 칠천량에서 원균대패.
이순신의 복권.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후퇴하는 왜군과 마지막일전. 
 
병자호란
​여진족이 세력키워 후금세우고 명과 싸움.
명의 파병요청. 광해군의 출병 파병하되 전쟁을 피한다.
광해군에 반대하는 세력이 주류. 반정 인조를 세움 
명나라 편을 들어 후금의 2차례에 걸친 침략.
10만의 청군 남한산성의 수비군 1만. 45일만에 인조의 항복. 청나라 은혜를 찬양하는 비석. 삼전도비. 소현세자가 청에 끌려감.
 

1.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일어난 과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봅시다.

조선은 나라를 세운 후 200년 동안 평화를 누렸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그러나 일본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을 지속하면서 군사들이 잘 훈련되어 있었다.

> 15세기 이전까지의 왜구와의 관계

- 링크 참조

> 일본의 상황

몽고의 침입을 극복한 가마쿠라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일본 천황)와 슈고 다카우지의 연합에 의해 무너지고,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된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다시 위 두 사람의 대립으로 초기에 2명의 덴노가 옹립하는 등 혼란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다이묘(일종의 지방관)의 권한을 증가시켰는데 시간이 지나자 막부의 주인인 쇼군보다도 다이묘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일종의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을 센고쿠다이묘라고 부르며 '오닌의 난'을 진압하며 성장하였다.

이 센고쿠다이묘 중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철포(조총)을 받아들이고 이를 3교대로 사격하는 총격전을 고안하였으며 기존의 부병제(농민을 단기간 징집)를 병농분리의 모병제로 바꾸는 등의 개혁을 통해 전국시대를 통일할 뻔 하였으나 부하의 반란으로 자살한다. 이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권력을 이은 사람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로 노부나가의 애신(愛臣)이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계를 구축하고자 가타나가리(칼사냥), 히토바라이(무사와 농민 등의 계급분리) 등의 개혁을 시도한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정복하려고 1592년 4월 13일 새벽에 부산으로 쳐들어왔다(임진왜란). 일본 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함락하고 한양(서울)으로 빠르게 향했다.

> 왜란 초기 해설

16세기 일본인들은 삼포왜란(1510), 을묘왜변(1555)을 일으켜며 조선과의 갈등을 심화하였다. 조선은 이에 따라 비변사를 설치하며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1590년 오다와라 전투를 승리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1592년 조선을 침략한다.

그렇다면 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치려고 했을까? 전국시대 통일 이후 공을 세운 다이묘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자 한 히데요시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본 본토의 땅만으로는 부족해지자 다이묘들을 이끌고 조선과 명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들은 조선을 거쳐 중국(명)으로 건너가 인도까지를 정벌하려고 하는 등 매우 자신감 넘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순신의 활약으로 최종적으로는 실패하게 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조선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계속해서 졌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했다. 육지에서는 거듭 패배했으나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무찌르고 있었다. (중략)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한양을 되찾으려고 이동했고,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군사를 이동시켜 (중략) 승리를 거뒀다.

> 왜란 중후기 해설

4월 13일 20만의 군대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4월 28일 신립장군이 이끄는 배수진을 친 중앙군과 충주 탄금대전투에서 승리하여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올라가 5월 2일에 한양에 입성한다. 그러나 이순신(23전 23승 무패의 장군)이 옥포해전(1592.5.7)에서 승리한 이후 한산도대첩을 통해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자 일본군은 보급로가 끊겨 곤란에 처하게 되었고 당해 12월 명의 이여송이 지원군으로서 참전하면서 육지에서도 왜군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권율의 행주대첩 이후 한양을 수복한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속오법을 실시하였다.

> 명의 상황

14세기 중반 개국한 명은 15세기 초 영락제 때 전성기를 맞아 정화가 아프리카까지 정벌하는 대규모 해외원정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그 후 급속도로 쇠퇴하여 1449년 '토목의 변(명의 정통제가 몽골과의 전쟁 도중 포로로 사로잡힘)'을 계기로 영향력이 감소되었다. 정통제를 폐위한 명은 경태제를 옹립하여 위기를 벗어났으나 이후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며,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북방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국력이 쇠퇴하였다. 명은 해금정책을 펼치고 조공무역을 받기만 했다. 임진왜란 시기가 되자 만력제 치하의 명나라에서는 보바이의 난과 양응룡의 난을 토벌하는 데에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일본군은 강화 회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강화 회담은 실패했고 일본군은 다시 침입했다(정유재란).

> 정유재란 해설

일본군은 강화회담을 제안하고 울산왜성, 순천왜성, 사천왜성 등을 축조하며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주둔하였다. 3년여에 걸친 휴전 회담에서 일본은 한반도의 남부의 3/4를 내달라 하고 명에는 명의 황녀를 후비로 하자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고 결국 이 회담은 결렬되어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임진왜란의 실패를 교훈삼아 전라도 곡창지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일본군은 8월 거제도 앞 칠천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대파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끈다. 그러나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9월 명량에서 133대 12척의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두게 되고 이 때문에 다시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현재의 천안)에서 북상하지 못하고 묶이게 된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1598년 울산왜성, 순천왜성 등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하며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1598년 9월 도요토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게 되고 철수하는 일본군들을 이순신이 노량에서 대파하여 승리하면서 7년에 걸친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종전하게 된다.

>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결과

조선 : 조선은 전쟁기간 동안 농토가 황폐화되어 토지가 전쟁 이전의 1/3수준에 머무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쟁비용 및 전쟁 복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납속책이 실시되면서 계급체계가 혼란해졌다. 이후 광해군과 인조 때에도 국력이 회복되지 않다가 명청교체이후 청이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을 거부하다가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급속도로 피폐해진다.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가 대립하며 세키가하라 전투(1600)를 벌이고 그 결과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에도 막부 시대가 시작된다. 에도시대에는 중앙집권화가 가속화되어 사(무사)농공상의 계급이 공고화되고 병농분리가 완성되었으며 무사들이 행정관료로 변화하게 되었다. 1607년에는 조선과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명 : 대군의 파병으로 인한 국력의 감퇴로 만주에 여진족이 흥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후금에 의해 멸망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볼 만한 활동>

 

기록을+토대로+거북선+상상화+그리기(교사+이준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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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21~22. 임진왜란이 일어난 과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봅시다.|작성자 이준영

2. 병자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봅시다.

세력이 약해져 가던 명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후 더욱 힘이 약해졌다. 누르하치가 이 틈을 타 여진을 하나로 통합해 후금을 세우고 명을 위협했다.

> 명나라의 몰락과 후금의 발호

보바이의 난과 양응룡의 난을 토벌, 그리고 임진왜란에 막대한 군비를 쏟고도 어떠한 이득도 거두지 못했다. 전쟁배상금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명은 재정적으로 위기에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도 영락제 이후 환관들이 정치를 혼란스럽게 이어가던 명나라는 만력제 때가 되자 황제가 일년에 정무를 보는 날이 10일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을정도로 태만한 정치를 펼쳤다. 이에 반해 누르하치는 만주지역의 여진족을 통일하고 조, 명, 일이 임진왜란으로 힘을 잃은 권력의 공백기에 힘을 키워나갔다. 만주족의 '만주'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이다.

광해군은 세력이 약해전 명과 새롭게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했다.

> 부차 전투와 강홍립

사르후 전투에서 명을 패퇴시킨 후금은 잇따르는 다른 전투에서도 명에게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위기를 느낀 명은 조선에게 출병을 요구하는데 이에 광해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병사 1만 3천을 강홍립에게 주어 출병시킨다. 강홍립은 부차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나 이 때 흙바람이 불어 조총이 무력해진 틈을 타 후금군이 양익을 덮치면서 패전하였다. 강홍립이 광해군으로부터 상황을 보아 투항하라는 밀지를 받았다는 설도 있으나 1만 3천의 병력 중 부차전투에서 7천이 사망하였고 지휘관(좌영장)이었던 김응하가 죽었던 점을 보아 신뢰성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한 세력은 명이 베푼 은혜를 저버린 것이라고 하여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다. 명과 전쟁 중이던 후금은 명을 돕는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선조는 첫 왕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자녀를 보지 못했다. 선조는 후궁 중 인빈 김씨의 자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햇으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공빈 김씨의 장남 임해군은 성품이 성품이 어질지 못하여 공빈 김씨의 차남인 광해를 왕세자로 삼았다. 그런데 선조는 이후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하여 1녀1남을 낳았는데,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이다. 적통의 후손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고(광해와 31살 차이) 광해가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있으므로 어린 왕자(영창대군)은 불안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승하하고 인목왕후는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꺠닫고 광해에게 왕위를 승계하였다. 그 후 임해군을 유배 및 이이첨에 의해 살해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광해군 5년(1613)에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1614년 8세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인목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와 같은 광해의 행위가 폐륜(폐모살제:어미를 폐하고 형제를 죽임)이라는 것을 명분삼아 김자점, 이괄 등 서인이 주축이 되어 인빈 김씨의 3째였던 원종의 장남 인조를 옹립하며 반정을 일으켰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와 서인은 명목론에 집착하며 폐위된 광해를 죽이지 않았으며,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하는데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던 이괄이 난(1624)을 일으킨다.(학설에 따라서는 이괄이 난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음) 조선이 난으로 혼란한 사이 이괄의 잔당은 광해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후금에 호소하고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에 자극된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1627)을 일으킨다.

긴급하게 기회를 얻게 된 후금은 3만의 군대를 출정시키면서 투항한 강홍립을 길잡이로 조선을 침공한다. 전쟁준비가 된 상태에서 실시한 전쟁이 아닌 정묘호란은 속전속결로 끝났고 조선은 후금과 강화를 맺고 돌아간다.

이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키워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정묘호란 떄 맺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하였다. (중략) 조선이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은 조선을 다시 침입했다.

> 병자호란의 배경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명과 청은 요동지역에서 전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명의 장수 몇명이 청에게 투항한다. 명은 이에 대한 토벌군을 출동시키면서 조선에 군량을 요구하고, 청 또한 이 청군의 군량을 조선에서 조달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때 인조는 양립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명의 요구만을 수용한다. 청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몽골을 정벌한 후 옥새를 획득하면서 조선에 내정간섭을 암시하는 국서를 발행한다.

국서를 받은 조선은 이에 갈등하다가 청의 홍타이지에게 국서를 보내는데 그 내용이 이러했다. '지금 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중략) 나라(청)가 무너질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후에 조선은 화해의 사절을 보내지만 사절이 도착하기도 전에 청군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기병 위주였던 청군이 파죽지세로 개성까지 4일만에,한양을 8일만에 돌파해내면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을 벌지 못했고, 그 결과 강화도 피신에 실패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식량도 부족했다. 이때 성안의 신하들은 청군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견해와 싸움을 멈추고 화해하자는 견해로 나뉘어 있었다. (중략)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 척화파와 주화파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신하들은 청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한다는 척화파(김상헌)와 화친하자는 주화파(최명길)로 나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구하러 오던 구원병이 쌍령전투에서 극도로 완패하고, 45일만에 식량이 떨어지자 인조는 청태종(숭덕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서울시 송파구 잠실로148:롯데월드 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흔히 삼배구고두의 예를 과장하여 머리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하는 것이 삼배구고두례라는 낭설도 있는데 삼배구고두례가 명을 따르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것은 맞지만 인조가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9번 조아린 것은 아니었다. 삼배구고두례는 청 황제를 맞는 신하는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예법이었으며 이제 명을 떠나 청을 섬기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의식이었다.

>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영향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보다 이 전쟁의 영향이 어떻게 이어졌는지가 사실은 역사를 공부할 때 더 중요한 부분이다. 병자호란의 결과 유교와 명나라 중심의 조선 식자층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북쪽의 오랑캐였던 청을 토벌하자는 북벌론과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론이 생겨났다. 북벌은 효종 때에 이르자 진척되는 듯 보였으나 청이 명 및 피지배층인 중국 한족의 반발을 완전히 극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청과 조공관계를 이어가다 러시아가 북만주 침략해오자 청과 함께 싸웠다(나선정벌)

[출처] 1-23. 병자호란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봅시다.|작성자 이준영

3.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을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즈음부터 조선의 지배층은 붕당을 이루어 정치를 이끌어 나갔다. (중략) 붕당 간에 의견 대립이 자주 일어나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워졌다.

> 사림의 분화와 붕당, 예송, 환국

사림이란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았던 온건파 사대부들의 후손으로 지방에서 교육과 학문연구에 힘쓰며 성장했다. 오늘날의 지폐에 새겨진 이황, 이이 모두가 사림이다. 이 사림은 성종 때부터 관직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여 훈구세력을 견제하였고 '연산군~명종'시기에 4차례의 사화를 겪은 후 선조 때에 이르자 정치를 장악하였다.

사림은 명종 때 심의겸(서인)과 김효원(동인) 사이의 이조 전랑 직을 둔 갈등을 계기로 서인(기호학파, 이이)과 동인으로 분화하였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올랐으나 서인은 서인 출신이면서 동인편에 서서 서인을 비판하던 정여립이 모반을 한다며 처형하였고 이를 따르던 동인들을 함께 처벌하였다(기축옥사)

세력이 약해진 동인은 선조 때 광해군의 세자책봉문제를 논한 정철(서인)의 처리를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정철이 실각하면서 서인에게 복수하였다. 결국 광해군 때 북인이 정권을 잡지만 끝내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 일부와 공존체제를 형성하였다.

인조의 아들이었던 효종이 죽자 서인과 남인은 계모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예송논쟁을 벌이는데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하고(기해예송), 기해예송은 서인이 승리하였으나 현종의 미운털이 박히게 되고 그 후 효종비가 죽자 계모가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재차 예송논쟁을 벌이는데 이 때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한다(갑인예송) 이 때에는 남인이 이기면서 서인은 위기를 겪는다.

숙종 때에 이르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극심해져 경신환국(서인 승리, 서인의 노론과 소론 분화 시작), 기사환국(남인 승리), 갑술환국(서인 승리)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인(주로 노론)이 승리하고 남인은 몰락한다.

이후로 서인은 이미 세자로서 경종을 밀던 소론과 연잉군(후의 영조)을 밀던 노론으로 분화되는데 숙종이 죽자 경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초기에는 노론의 세력이 워낙 강하여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는 등 조심스럽게 지내다가 영조의 대리청정을 거론한 노론 4대신을 처형하고, 이에 득세하던 소론 또한 처벌하는 등 경종은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러나 연잉군(영조)가 경종에게 감과 간장게장을 진상하는데 이것을 먹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며 노론이 득세한다. 이후 정조 때에 이르자 노론 또한 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임오화변)의 정당성을 놓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시파와 사도사제에 대해 강경파였던 벽파로 나뉜다. 최종적으로는 벽파가 승리한다.

영조는 탕평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 영조의 정책

영조의 즉위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그가 천민의 자식이라는 것, 둘째, 그가 형인 경종을 죽인 살인자라는 것, 셋째, 노론에 의해 집권하게 된 왕이라는 것. 이에 따라 영조는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성격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영조는 당파색이 강한 인물보다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는 완론탕평책을 펼쳤다. 이들은 일종의 새로운 당이라 할 수 있는 탕평당이 되어 영조에게 협조했으나 왕실과 외척관계를 맺어 권력다툼을 하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 사림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대폭 정리했으며 이들이 민심을 대표했다는 산림(영향력 있는 사림)의 공론을 부정하고 신문고 제도를 활용하였다.

정조는 인재를 고루 뽑아 정치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중략) 수원 화성을 건설하고 상업의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붕당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정조의 정책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임으로 이끌었던 벽파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왕권 강화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는 준론탕평을 실시하였다. 그는 특히 학자군주로서 자신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관점에서 정치를 펼쳤고, 붕당을 넘어서 왕에게 협조할 수 있는 신세력을 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규장각의 설치로, 군사적으로는 장용영의 설치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탕평책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노론 벽파가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해볼 만한 활동>

1. 붕당의 계보도 그리기
2. 탕평채(요리) 만들기
3. 붕당의 문제점 게임으로 체험하기

[출처] 2-2.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을 알아봅시다.|작성자 이준영

4. 조선 후기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노력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백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학문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자 실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했다.

>실학의 대두

근현대에서 조선시대를 조망하다 보니 실학을 강조하게 되고 실학을 유교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문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학은 유교의 한 종파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이 공리공론에 휩쌓인 허학이 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또 하나의 유교 이론이다.

특히 기존의 성리학이 농민층이 해체되고 있는 조선후기의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의 가치관을 통해 조선후기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상이다. 즉 '농민층이 분해되며 4신분제도가 흔들리는 조선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올바른 왕도정치의 유교적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힘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들은 새로운 문물과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며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실학의 연구 분야

- 경세치용학파(중농학파) : 농업생산량의 증대와 토지제도의 개혁을 추구. (균전론, 한전론, 여전론, 정전론)
-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 : 상공업의 발전과 청으로부터의 신문물 수입을 추구.
- 국학파 : 화이론(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에서 탈피하여 조선의 정체성을 조선의 지리, 역사, 문화, 세시풍속 등을 연구하여 형성하고자 함.

<해볼 만한 활동>

박지원의 <양반전> 함께 읽기

박지원의+양반전+함께읽기(교사+이준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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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3. 조선 후기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노력을 알아봅시다.|작성자 이준영

5.  서민 문화에 나타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봅시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참여할 수 있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이를 서민 문화라고 부른다.

> 조선 후기의 서민 문화

한글 소설, 풍속화, 탈춤, 판소리 등의 새로운 양식으로 문화가 발달하였다.

과거에도 소설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유교의 도덕이나 장군의 호승심을 일으키는 부귀영화류의 귀족 문학이었다. 그러나 한글소설은 백성들의 관점에서 서얼 차별, 신분제의 모순, 농촌사회의 붕괴 등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림에 있어서도 가상의 산이나 자연물을 담는 실제의 모습을 그리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고 전반적으로 산수화보다 일반인들의 삶의 양식을 그리는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또 민화도 유행하였는데 한국 전통 이야기를 그리는 등 백성들이 친숙한 소재를 많이 그렸다.

탈춤은 상전인 양반을 모욕하거나 파계승을 풍자, 부부싸움이나 남녀 간 갈등, 서민생활의 빈곤함 등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공연예술로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었다. 판소리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전달하는 종합예술의 형태로 점차 발전하였다.

<해볼 만한 활동>

신윤복의 <월하정인> 뒷이야기 상상하기

신윤복의+월하정인+뒷이야기+상상하기(교사+이준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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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4. 서민 문화에 나타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봅시다.|작성자 이준영

6. 흥선 대원군의 정책과 강화도 조약을 살펴보고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알아봅시다.

정조 이후 왕들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왕의 외척이 나라의 권력을 잡는 세도정치가 나타났다.

>순헌철(순조, 헌종, 철종) 시기의 조선

순조는 11세, 헌종은 8세, 철종은 19세 때 왕위에 올랐다. 순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신유박해)이 진행되었고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점차 과거제도가 문란해졌고 탐관오리의 수탈이나 세금 전가가 심해지는 '삼정의 문란'이 나타났다.

* 삼정의 문란 :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 토지세)·군정(軍政, 군역세)·환정(還政, 구휼미를 빌려주는 정책)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

그 후 1811년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고 1816년 이양선이 출몰하는 등 사회혼란이 가속화되었다.

헌종 때에는 수해, 전염병 등이 일어나고 순조 떄처럼 천주교에 대한 탄압(기해박해)이 이루어졌다. 전반적으로 세도정치의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철종 때에는 1862년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어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순조, 헌종, 철종의 치세에는 조선후기의 신분제적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하고 악화되기만 하였다.

세도 정치와 농민들의 불만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무렵,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정치적 실권을 차지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 철종이 죽자 왕실의 종친이었던 고종(당시 13세)이 즉위하였다. 이에 대원군이었던 이하응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 안동 김씨 숙청.

- 붕당의 폐해를 막고자 47개 서원 정리 및 모든 서원 철폐.

-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 법전 편찬을 통한 법률제도 확립.

-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의 권위 회복 및 삼군부 설치.

- 사창 설치하여 세제 개혁 및 양반과 상민의 차별없는 세금 징수.

- 경복궁 중건, 원납전 징수, 당백전 발행

- 병인양요, 신미양요 발발

- 척화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개항을 바라는 나라 안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압박을 받게 되자 조선은 결국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항했다.

>운요 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일본 군함인 운요 호가 한강 하구에서 초지진 포대의 포격을 받자 함포 사격으로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간인을 살상 및 약탈한 후 일본으로 회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조선에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였다.

운요 호 사건으로 촉발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은 일본국과 평등

- 경성에 외교 사절을 파견함

- 일본은 일본어 공문을 발송함.

- 불가항력의 경우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 임의 기항이 가능함.

- 일본 항해자의 자유로운 측량을 허가함.

- 개항장에서 치외법권을 허용함.

- (+추가된 조일 수호 조규 부록) 일본의 화폐를 조선에서 사용 가능함.

- (+추가된 조일 수호 조규 부록)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함, 상품 무역의 무관세.

<해볼 만한 활동>

1.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를 두고 토의하기.

2. 어린이를 위한 강화도 조약 대본 읽기

어린이를+위한+강화도+조약+대본+읽기(교사+이준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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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5~6. 흥선 대원군의 정책과 강화도 조약을 살펴보고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알아봅시다.|작성자 이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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