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회

몽골과 고려의 관계 요약

by anakii1 2023. 3. 27.
  • 13세기 초 징키즈칸의 몽골 초원 통일. 무신정권기
  • 고려는 몽골과 외교관계. 사신 암살 사건으로 국교단절. 명목상 금나라의 신하국 고려에게 경고성으로
  • 1231년 1차 침입 (살리타가 이끄는 3만)- 귀주성에서의 분전. 개경이 포위되어 인질,공물로 화해 -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며 군대를 정비
  • 1232년 2차침입 - 서경과 개경 함락. 고려는 강화로 천도한 상태 - 전국을 불태우려 남진하다 용인 처인성에서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을 맞고 사망. 몽고군 퇴각. 많은 문화재불탐.
  • 1235~1239년 3차 침입금나라 멸망 후 고려에 보복. 조정은 강화도. 전국을 돌며 불태우고 점령. 황룡사 9층 목탑. 마산의 몽고간장. 고려 고종의 몽골입조를 조건으로 강화. 왕족을 왕제라 속이고 입조시킴
  • 1247~1248 4차침입 - 강화도 출륙을 구실로 침공.' 선철군 후출륙하기로 하고 철군.
  • 1253~1254 5차 침략 몽케 칸(원 헌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침공. - 계속 패하던 고려군은 충주에서 김윤후 장군이 대승을 거두며 철군. 왕자를 인질로 데려감. (왕자가 아니라 친척이었음)
  • 1254 6차침입. 원헌종이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며 5천의 군사로 침공. 전투에 모두 고려가 승리했지만 5개월간 고려인 포로가 20만명. 몽골의 노략이 심화됨.
  • 1255~1259년 7차~9차침입. 몽골이 수군을 이용함. 출륙과 입조의 조건. 거의 몽골군이 고려에 머무른 시기.
  • 1259년 8월 헌종 사망. 쿠빌라이와의 권력 교체기에 고려태자가 쿠빌라이를 지지하며 강화. 원종이 됨, 뭇힌 정권의 반대로 개경환도를 못하다가 원종이 폐위되고 영종이 오름. 무신정권 실력자ㅣ 임연이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 지 10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전쟁 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려는 몽골군에게 굉장한 인명 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몽골 침입 이전의 목조 건물도 많은 피해를 봤다.​ 
당시 한반도 내 주요 도시와 고을 대부분은 피해를 보지 않았던 지역이 없었을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하였다.
원종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 칸은 이후 원종이 임연에 의해 강제 폐위되자 원종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곧 짐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천명하며 원종이 복위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본인에게 정치적 이득을 안겨준 덕분인지 쿠빌라이는 고려와 강화를 맺으면서 고려 측의 요구인 "고려 고유의 전통과 체제를 바꾸지 않는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25] 조항을 받아준다. 즉 고려의 독립성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1270년에 고려 조정은 정식으로 개경으로 환도하고 원종이 정식으로 카라코룸의 몽골 황궁에 입조하여 쿠빌리아 칸과 회담을 하면서 39년간의 여몽전쟁은 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고려는 몽골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고[26] 몽골 측에서 받아들여 훗날의 충렬왕이 되는 세자 왕심이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보르지긴 쿠툴룩켈미시(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다.[27]
무신정권 친위부대인 삼별초의 저항​​ - 강화-진도-제주로 이어지며 저항. 여몽연합군에의해 전멸.

댓글